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르빈 폰 비츨레벤 (문단 편집) === [[제1차 세계 대전]]과 전간기 === 1881년 [[프로이센 왕국]] [[슐레지엔]]주의 [[브레슬라우]][* 현 폴란드 [[브로츠와프]].]에서 태어났다. 부친 게오르크 폰 비츨레벤은 프로이센 왕국 군대의 대위였다. 그리고 1901년 [[독일 제국군]]에 입대하고 1차대전에서 [[베르됭 전투]], 상파뉴 전투를 겪으며 큰 부상을 입게 되고, 1급과 2급 [[철십자 훈장]]을 수여받게 된다. 그뒤 독일 참모 훈련을 마치고 121사단으로 보내진다. 1차대전이 끝나고 [[전간기]] 동안에는 1923년 [[바이마르 공화국]]에서 그는 소령으로 진급하였으며, 1929년엔 중령으로 진급한다. 이후 진급을 거듭하였다. || [[파일:340px-Bundesarchiv_Bild_102-00357A,_Wilhelm_Heye,_Erwin_v._Witzleben.jpg]] || || [[국가방위군]] 시절의 비츨레벤 || || [[파일:786px-Bundesarchiv_Bild_146II-728,_Berlin,_Olympiade,_Hitler,_v__Witzleben,_Dietrich.jpg|width=510]] || || ▲ 1936년 [[베를린 올림픽]]. 왼쪽이 [[아돌프 히틀러]], 가운데가 보병대장 시절의 비츨레벤, 오른쪽이 [[슈츠슈타펠|SS]] 상급집단지도자 시절의 [[요제프 디트리히]]다. || 그는 반나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, 1934년에 비츨레벤은 그와 [[에리히 폰 만슈타인]], [[게르트 폰 룬트슈테트]], [[빌헬름 리터 폰 레프]]와 함께 장검의 밤에서 슐라이허와 브레도우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을 때 나치 정권은 반대하였다. 블롬베르크-프리치 사건에서 [[베르너 폰 프리치]]에 대한 히틀러의 강제 사임에 대한 그의 비판의 결과로, 비츨레벤은 전역을 강요받았다. 그러나 히틀러가 곧 제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는 데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의 "전역"는 오래가지 못했다. 사실 이외에도 반나치적인 행적이 많았는데, 예를 들어 [[오스터 음모사건]]의 일원이었으며, 1939년에는 [[커르트 폰 에쿼드]]의 음모에 참여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